가을은 독서의 계절…!🍂 사실 계절 신경 쓰지 않고 책을 읽는 편이지만, 가을이 되면 '독서의 계절'이란 표현을 늘 곱씹어보게 됩니다. 님은 요즘 어떤 책을 읽고 계신가요? 혹시 독서 중인 책 리스트 안에 은행나무의 책이 들어있는지 궁금합니다.😄 오늘의 은근한 레터는 이전까지 시도해보지 않은 스타일로 준비해보았는데요. 바로 은행나무의 해외문학 편집자 🐁머위 님과 책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눠보았어요.💬 분량 조절 실패로 좀 길어졌지만, 부디 재밌게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해볼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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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새 |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한번 부탁드려요.
머위 | 안녕하세요. 해외문학팀 편집자 🐁머위입니다.
박새 | 냅다 인터뷰 뉴스레터를 써보자고 했음에도 승낙해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처음 해보는 거라 무척 자유분방하게 질문드리게 된 점 사죄드리며… 시작해볼게요. 저희 출판사에 계신 분들이 다들 그런 경향이 있지만, 저에게 머위 님은 '본격적'인 이미지거든요. 읽고 있던 책이나 보던 애니메이션을 덮어두고 원고에 집중하는 모습을 목격해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머위 님이 지금까지 편집한 책 중에서 기억에 남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머위 | 올 여름 6월 3일 출간된 《Y/N》이요! 아이브의 노래 〈Off The Record〉에 ‘날 탐하면 모든 걸 견뎌야지’라는 가사가 있어요. 소설 속 익명의 화자 Y/N이 사랑하는 케이팝 아이돌인 문이 무대에서 팬들에게 선포하는 대사 같지만, 저에게는 이 원고가 제게 은밀히 내린 호령처럼 들렸어요. 무언가에 완전히 매혹된 사태를 다루는 《Y/N》처럼 저를 비롯한 모든 담당자들이 이 기이한 사랑을 옮기기 위해 문을 향한 Y/N의 마음 못지않은 집착으로 책을 만들었습니다. 바람 부는 거대한 환풍구에 외치듯 늘 과잉되고 비장한 심정으로 소개하게 되는 책이에요. 여러분, 많이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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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새 | 거대한 환풍구 앞에서 거센 바람을 맞고 계신 머위 님을 상상하지 않을 수가 없다…! 《Y/N》은 제가 맡은 책은 아니었지만, 담당자분들이 성심껏 임하고 계신 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어요. 저도 개인적으로 앞으로도 쭉 잘 됐으면 하는 책이고요. 《Y/N》은 '환상하는 여자들'이라는 해외문학 시리즈에 수록된 작품인데요. 최근에 만든 《나무좀》도 그렇고, 이 시리즈 책들은 모두 색깔이 뚜렷한 것 같아요. 한번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머위 | [환상하는 여자들]에서 [OO하는]은 변수 항목이에요. 언제든 바뀔 수 있어요(변신하는 여자들, 양치하는 여자들, 졸음 참는 여자들, 도망치는 여자들 등 무궁무진합니다). 우선 [환상하다]는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단어인데 접사 [-하다2]의 쓰임상 동사로도 형용사로도 볼 수 있어요. 그리고 '환상'과 '하다' 사이에 끼어드는 이질감 덕분에 다시 한번 말을 돌아보게 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환상(幻想)이라는 단어는 영어의 fantasy나 illusion보다 좀 더 장소성이 강한 느낌이에요. 숲과 늪과 구멍 같은. 뭔가 [환상하다]는 말에서 마법진을 포리릿 치는 듯한 이미지가 연상되지 않나요? 지금까지 출간된 네 권의 책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우주의 알》은 초월하는 환상, 《마녀들》은 정화하는 환상, 《Y/N》은 투쟁하는 환상, 《나무좀》은 그을리는 환상이에요. 모두 2020년 이후 발표된 해외 신진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요. 번역 출간 시 이미 국내에서 인지도가 있는 작가의 데뷔작을 추후 소개하는 경우가 더 많을 텐데, 이 책들은 전부 초면인 작가들의 데뷔작이다 보니 각별한 와중에 다양한 서브 텍스트를 함께 만들어가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껴요. 마음 같아서는 쿠키라도 구워 바다 건너 어디든 찾아가고 싶은데… 마감이 있어서 노션에 소박한 아카이빙을 하거나 채널예스에 국내 작가분들께 받은 리뷰를 올리고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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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위 & 🦊여우 님이 한 땀 한 땀 가꾸고 계신 '환상하는 여자들' 아카이브!
이미지를 클릭하면 보러 가실 수 있습니다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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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새 | 노션에 아카이빙하는 거 좋은 아이디어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국내 독자에게는 낯선 작가들의 작품들이라 정보를 찾고 싶어도 없을 때가 많잖아요. 관련 내용을 한곳에 모아두는 작업이 손이 많이 갈 텐데, 감사해요. 그래서 그런데, 요즘 해외문학팀이 독자님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려고 하신다는 걸 느껴요. 인스타그램도 파셨잖아요! 잘 되어가나요?
정보 1. 해외문학팀의 인스타그램 아이디는 @reprintplz 다. 재쇄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정보 2. 해외문학팀 인스타그램에 새 게시물이 올라오지 않은 지 한 달 하고 2주가 흘렀다.
머위 | 인스타그램을 활용하고 싶지만 포스팅 하나 쓸 때마다 보도자료 쓰는 기분이라 어렵더라고요. 비장해지는 걸 좀 내려놓아야 할 것 같아요… 하지만 이제 정말 본격적으로 해보기로 해서요. 성원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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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쓰는 기분"이라는 머위 님의 말처럼, 각 게시물 모두 정성 가득한 해외문학팀의 인스타그램 계정도 구경하러 오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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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새 | 부담드리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어쩐지 머위님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진 듯한 느낌… 아무튼 새로운 게시물 기다릴게요. 가장 최근에 작업한 책은 《나무좀》이잖아요. 이 책 얘기를 해볼까요? 라일라 마르티네스 작가의 소설 데뷔작!이며, 스페인의 역사를 담고 있는 신비하고 강렬한 공포소설인데요. 국내 독자님들에게 조금 익숙할 마리아나 엔리케스 작가가 ❝시와 복수로 지어진 여성들과 유령들의 집.❞이라는 추천사를 남겨주셨죠. 김이삭 소설가가 ❝이 환시는 신의 참된 계시일까, 아니면 악마의 유혹일까.❞라는 멋진 문장을 선물해주시기도 했고요! 《나무좀》은 어떤 책인가요?
머위 | 《나무좀》을 처음 알게 된 건 에이전시 소개 레터였는데, 저자 약력이 독특해서 곧바로 관심이 갔어요. 레반타 푸에고(Levanta Fuego, ‘불길을 일으키다’라는 뜻)라는 남다른 출판사를 운영하고 시도 쓰고 번역도 하고 강연도 하고 사슴뿔을 달고 초현실주의 퍼포먼스도 하고…. 2021년에 발표한 《나무좀》은 저자 라일라 마르티네스의 외할머니 옷장에서 시작된 이야기예요. 할머니 댁에서 머물던 어느 여름, 침실 옷장 문이 저절로 끼익하고 열린 순간 그 집에 얽힌 역사와 살아남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주인공은 스페인 라만차 지역의 한 귀신 들린 집이에요. 원혼들의 몸이자 무덤인 이 집에는 20세기 스페인 내전(1936~1939)과 이후 프랑코 독재 정권이 남긴 어둠이 짙게 드리워져 있어요.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역사적 기억이 “산책” 등의 당시 은어로만 드러난다는 것인데요. 전쟁 전후로 당시 스페인 사회에는 밤에 상대 진영의 인물을 찾아가 벌판으로 끌어낸 다음 총살해 보복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해요. 이를 '산책을 시킨다'고 표현했다 합니다. 또 정권에 반대하는 게릴라들은 산에 숨어 있다가 경찰과 특권층에 의해 살해당하곤 했는데, 마을 부자들이 사냥 파티를 열어서 오락하듯 죽이는 식이었대요. 소설에서 직접적으로 설명되는 부분은 아니에요. 오히려 집이 내는 기기묘묘한 소리들과 귀신 들린 여자들의 분열적인 중얼거림이 페이지 대부분을 차지하거든요. 하지만 “산책”이라는 단어가 주는 스산하고 잔혹한 기운이 소설 전체에 도사리고 있어요.
박새 | 《나무좀》 덕에 스페인에서 '산책'이라는 말이 갖는 다른 의미를 알게 돼서 좋았어요. 좀 거창하긴 한데, 머위 님에게 《나무좀》이 갖는 의미를 여쭤봐도 될까요?
머위 | 저에게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 책이에요. “모든 가족의 침대 밑에는 죽은 자들이 살고 있어.”라는 대사가 종종 들이닥치듯 떠올라요. 《나무좀》의 집은 죽음으로 지어졌고 죽음으로 지탱되고 있으며 죽음을 끊임없이 상기하는 공간이에요. 어쩌면 《나무좀》의 집뿐만 아니라 모든 집이 그럴 거예요. 가령 제가 서울에서 오래 살아온 동네는 이태원 못지 않게 엄청난 고지대인데, 과거에 높은 낭떠러지 언덕이 있었고 여기에 죽은 시신들을 던져서 처리했대요. 지금은 그 언덕에 인력시장이 조성되어 있어서 건설현장 노동자들이 새벽에 대규모로 몰려들었다가 직장인이 출근할 시간이 되면 흩어져 사라져요. 또 서울의 일부 지역은 예전에 공동묘지로 빼곡히 뒤덮여 있기도 했고요. 최근에 한 기사에서 김혜순 시인이 “한국은 억울히 죽은 자들이 많아 유령의 밀도가 높은 나라이다, 그 목소리들이 나를 점령해서 빼곡한 죽음을 쓰기 시작했다, 죽음을 실천하는 것이 시의 정치학이다”라고 한 말을 봤어요. 《나무좀》의 문제의식과 겹치는 부분이라 옮겨둡니다. 이 책을 통해 스페인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무수한 죽음들에 대해 알게 된 면도 있지만, 《나무좀》의 집이 존재해온 방식이 지금 내가 살아가는 곳의 그것과 너무 똑 닮아 있어서 내 발 아래 있는 죽음들을 자연히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애도되는 죽음 외에도 죽음이라고 명명조차 되지 않는 미세한 죽음들이 있고, 보통의 일상이 영위되고 작동되는 원리 자체가 그런 죽음들로 촘촘히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 뜨거운 실외기 바람에도 죽음이, 매일 마시는 티백 하나에도 죽음이, 누군가의 하루 끝에는 하루치 노동의 죽음이… 모든 것이 죽음으로 쌓아 올린 공간이구나. 최근 인문팀에서 나온 마크 로스코 관련 책을 읽다가 이런 노래 가사를 봤어요. “어떤 사람들은 무덤에 발을 묻고 태어나, 나는 아니지만”. 그런데 사실 모두가 무덤에 발을 묻고 태어났을 뿐 아니라 발을 점점 더 깊게 빠뜨리는 방식으로 사방의 죽음에 휘말려 살아간다는 걸 이 책이 환기해줬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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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새 | 저는 담당 도서를 한 번 정독하고, 이후에는 발췌독하는 편인데요. 《나무좀》은 놓친 단서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출간 이후에 종이책으로도 한 번 더 정독했어요. 역시 단숨에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짜릿한 작품이더라고요. 제가 특히 좋아하는 건 이 작품이 소설 속의 이야기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앞서 머위 님의 설명에서도 언급되지만, 이 작품은 스페인 역사에서 출발하잖아요. 전쟁은 누구에게나 버거운 사건이지만, 그럼에도 여성들에게는 중첩된 고통이 있었다는 것을 짚어주는 게 좋아요. 개인적으로 손녀가 하라보 부부의 아들이 없어진 일에 있어서 변명(?)하는 장면도 기억에 남고요. 숨도 쉬지 않고 말을 내뱉는 것 같은 온점 없는 구성이 재밌어요. 이 책 편집하는 것은 어떠셨어요?
머위 | 맞아요! 숨도 쉬지 않고 말하는 대사가 여러 번 등장해요. 게다가 서사가 선형적인 듯하면서도 묘하게 시간을 흐트러뜨리고 있어서 매번 멀미하면서 읽었어요. 《나무좀》의 여성들이 대대로 하녀로 일해온 마을의 특권층 집안 하라보 부부의 아들이 커서 하라보 부부가 되고, 또 그들이 낳은 자식이 커서 하라보 부부가 되는 등 인물 지칭을 바꾸지 않는 방식으로 폭력적 구조의 반복과 대물림을 표현한 지점도 교정 보던 와중 돌연 얘가 아빠였나 아들이었나 아까 죽은 그 사람이 맞나 다시 확인해야 해서 멀미 요인이었어요. 곳곳에 모호한 표현도 많아 우리말로 옮길 때 해상도를 어디까지 조절할지 역자 선생님과 논의하기도 했고요.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집에 깃든 죽은 자의 혼을 “어둠의 그림자(들)”로 지칭하는데 이 번역 표현의 출발어는 그늘·응달·유령 등을 뜻하는 스페인어 명사 'sombra(s)'예요. 이들이 때로 형상을 가지기 때문에 '어둠의 존재들' 혹은 '어둠의 유령들'로 옮길 수도 있겠으나 출발어를 풍부하고 시적으로 담아내기 위해 '어둠의 그림자들'로 옮겨보자고 역자 선생님이 제안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박새님 말대로 이 소설은 어지러운 와중에도 짜릿한데, 역시 복수를 다뤄서가 아닐까요! 《나무좀》의 복수는 정체성의 문제와도 연결돼요. 누구나 어떤 소문과 오해, 혹은 기쁘든 버겁든 내가 연기하고 사칭하는 이미지들에 휘말려 살아갈 텐데 이 작품은 그 오염된 이미지를 거두어내자ー누명을 벗자ー는 주장에서 벗어나 용맹하고 시원한 태도를 취해요. 오히려 누명을 역이용하는 식이에요. 가령 《나무좀》의 이름 없는 소녀는 마을에서 벌어진 한 사건의 범인으로 믿어지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 이유는 소녀가 가난하고 천박하며 미친 여자의 집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실제로 소녀는 사건의 범인이 맞아요. 다만 인과가 뒤엉켜 있어요. “만약 내가 정말로 (…) 죽일 만한 사람이라고 믿는다면, 최소한 그렇게 믿게 할 만한 명분을 그들에게 줄 계획이었다.” 오인받는 것에 대해 오인하도록 하면서, 나아가 너희가 오인할 명분이라도 만들어주마! 하더라고요. 호오오… 저는 이 대목에서 《나무좀》의 비범함을 느꼈어요. 오해를 감행하며 경멸과 모욕에 대항하기. 그렇게 감옥 같은 표식을(또한 감옥이었던 집을) 저주의 주문으로 바꾸는 게 멋져서요. 맞아서 죽은 돌을 갈아 새로운 돌 무기를 만드는 거예요. 약간 연금술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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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도 쉬지 않고 내달리는 대목- 님도 꼭 읽어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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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새 | 근데 이 작품이 스페인의 호러 소설이잖아요. 평소에 호러 소설을 즐기는 편이세요? 머위 | 호러물 마니아는 아니지만 꺼리는 편도 아닌 거 같아요. 그런데 호러와 공포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저의 경우 뭔가 호러는 장르적으로 문법화된, 각종 클리셰들(서구적 외계 생명체들의 형상)이 장엄하게 떠오르고, 공포는 좀 더 신체의 즉각적인 반응처럼 다가와요. 으스스하고 불안한 감각 자체가 공포에 해당한다면 제가 보는 모든 건 공포일지도 모르겠어요. 《나무좀》의 경우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고딕 문학 계보에 있는 소설이고, 비교적 성스럽고 온순한 오컬트에 가까워요. 저자가 이 소설을 호러로 쓴 이유에 대해, 자신은 호러 소설에 굉장히 친숙한 독자이고 무엇보다 “공포는 집단 트라우마를 다루기에 유용”하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왜일까요? 공포는 주장할 수가 없어서 아닐까요? 이 소설 속 여자들이 '나무좀이 몸속에 기어다니는 가려움'을 대대로 겪는 것도 그와 연관되는데, 간지러움은 긁어서 상처를 내지 않는 한 증명이 전혀 안 되는데 생활의 모든 걸 잠식해버릴 만큼 어마어마한 고통의 밀도로 실재하잖아요. 더군다나 이 집의 여자들은 피부 표면이 아니라 몸속이 으슬으슬하게 가려운 것인데! 평생 피부염과 살아온 저로서는 정말 참을 수 없는 설정이에요. 증상은 명확한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곧잘 부정되니까 공포는 늘 어떤 징후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고 무궁무진한 듯!
박새 | 머위 님께서 호러가 뭔지 자문해주신 덕에 저도 조금 생각해보게 됐어요. 저는 긴장감이 감도는 상황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고, 그런 이유로 아직 추천해주신 영화 〈샤이닝〉을 아직도 보지 못했는데요… 각자 두려움을 느끼는 포인트가 다를 텐데, 저는 어이없게도 ‘예상치 못한 무언가'가 나오는 것만큼이나 ‘예상되는 무언가를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샤이닝〉이 공포 영화라는 것을 모르고 켰을 때만큼이나, 무서운 상황이 펼쳐질 것임을 알고서 기다리는 것이 무서운 것이죠. 아는 공포가 가장 무섭다, 뭐 이런… 그 말인즉슨 클리셰가 가장 호러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포장해봐도 되지 않을까, 싶고요. 피할 수 있으면 피해라, 의 맥락에서 제가 읽은 호러 소설이 거의 없다는 사실도 덧붙여봅니다.
머위 | 박새님 답을 읽으니 예전에 제 친구가 “그리스 신탁처럼 모든 게 정해진 것처럼 벌어질 때가 가장 무섭다”는 말을 했던 게 기억나요. 이 소설도 공포와 혐오가 완전히 바깥의 것을 향한 게 아니라 결국 나(혹은 공동체) 안에 우글거리며 존재하나 인정하기 꺼려지는 것들을 어떤 외부적 대상으로(《나무좀》의 경우 귀신 들린 여자들이 살아가는 집으로) 대치해서 변환한 것이라는 걸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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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의 살인마 잭의 얼굴이 패턴으로 수놓인 방한 모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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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새 | 지금 제가 아무 말이나 뱉고 있는데, 머위 님이 잘 포장해주시고 있는 것에 무척 감격하고 있습니다. (후후) 저희 플레이리스트도 만들었잖아요. 저는 평소 K-pop 리스너인지라, 이번에 플레이리스트를 위해 음악을 찾고 배치하는 게 색다르고 재밌는 경험이었는데요. 머위 님은 음악 청취의 폭이 넓고 일단 많이 들으시니까… 어떠셨어요? 가장 마음에 드는 곡 1개만 뽑아본다면?
머위 | 캐해(캐릭터 해석)라는 말이 있듯 플레이리스트는 원해(원고 해석)의 영역 같아요. 캐해가 입덕을 위한 것인 만큼 플리 만들기도 원고에 몰입하기─입덕─을 위한 장치라 개인적 수양 차원에서 꼭 합니다. 다만 다른 분들에게도 공유할 플레이리스트를 짤 때는 정말 노동의 영역이라는 걸 느껴요! 긴요한 부분이 아닐수록 집착하게 되어서요. 원고의 흐름과도 맞아야 하고 무엇보다 다음 노래로 전환될 때의 리듬에서 발산되는 쾌감을 위해.... 요새 플레이리스트가 다방면에서 채택하는 콘텐츠가 되었는데, 다들 어떻게 꾸리는 것인지 궁금해요. 엄청난 노고일 터인데. 그러니까 많이 들어주시와요. 《나무좀》 플레이리스트는 박새님과 함께 구성해서 생각지도 못한 노래ー〈헌터x헌터〉의 레퀴엠!ー가 들어가서 재밌었어요. 함께 둔 노래들 중에 여러분께 가장 영업하고 싶은 곡은 스페인 음악가 Marina Herlop의 ♬〈Shaolin Mantis〉입니다. 제목을 직역하면 ‘소림사의 사마귀’인데요. 사냥을 위해 앞다리를 비비듯 모은 자세 때문에 사마귀를 'praying mantis', 줄여서 'mantis'라고 부르는가 봐요. 제목에서 느껴지듯 소림사의 사마귀가 한바탕 무협 춤을 추며 내는 소리를 형상화한 듯한데 처음 시작할 때 들리는 유령 사운드가 무척 귀엽습니다. 그냥 이 곡이 들어간 앨범 [Pripyat]를 통째로 추천하고 싶은데요, 앨범의 이름은 체르노빌 원전 폭발 이후 버려진 우크라이나의 도시 '프리파야트'에서 왔다고 해요. 노래 곳곳에서 글로솔라리아(모어에 기반하되 외국어처럼 들려 해독 불가능한 소리를 내뱉는 것)라고 부르는 주술적 언어를 사용하는데 이 점도 《나무좀》과 무척 잘 어울립니다! 게다가 앨범 표지도 곤충 형상의 천사 주물이에요. 〈Shaolin Mantis〉를 고른 이유가 《나무좀》의 집에 출몰하는 천사를 소녀가 묘사하는 대목 때문이거든요: “그들은 오히려 사마귀같이 거대한 곤충이 기도하는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노래를 들으면 자동으로 《나무좀》의 소녀가 소림사의 전사 차림을 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자들을 향해 저주 훈련을 하는 장면이 머릿속에 전개되곤 합니다.
박새 | 이 질문을 드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 머위 님이 음악 얘기하실 때, 제가 놓친 부분을 잘, 자세히 알고 계셔서 즐거워요. 아! 저작권 이슈로 인스타그램에만 올라가고 유튜브 플레이리스트에는 존재하지 않는 곡이 2개 있는데요. 저는 그중 ♬ Cluster-Nabitte라는 곡이 정말 좋았어요. 제가 처음 《나무좀》을 읽었을 때 느낀 수상함 같은 게 잘 드러나는 것 같달까요. 옷장이 움직이고, 계단이 사람을 가려가며 삐걱대고, 할머니와 손녀에게 유령들이 말을 걸고. 저에게는 너무나 비일상적인 상황을 그 곡이 보여주고 있는 듯하여 마음에 들었는데… 아쉽게 되었네요. 모쪼록 이 레터를 읽고 계신 분들이 개인적으로라도 검색해서 한번 들어봐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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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새 | 몇 번 레터에서 언급하기도 했는데, 저는 95% 한국 문학 독자거든요. 그래서 은행나무에 들어와서야 알게 된 해외 작가들이 많아요. 문득 '내가 모르던 분야를 알게 된다!' 가 출판사 입사의 장점 중 하나가 아닐까 싶네요. 그래서 궁금해졌는데요, 머위 님은 해외문학 편집자로 일하고 계시니까, 이전에는 주로 어떤 책과 주제에 관심을 가지셨나요? 해외 도서를 편집할 때(혹은 스페인 소설을 편집할 때)의 어려움 같은 것은 없는지도 궁금하고요. (저라면 모르는 지역의 글을 보자마자 스트레스를 받으며 머리카락을 뜯을 것 같고요…)
머위 | 예전에는 별 생각 없이 읽었던 낯선 외국의 고유명사들이 요즘은 책을 만든 분들이 가까스로 해독해낸 암호처럼 보여요. 그래도 주요 등장인물이 열 명 이하라면, 그들에게 별명이 두 개 이상이 아니라면, 국적이 다섯 개 이하라면, 화자에게 지나가던 사람을 보는 족족 그가 입은 의상을 세밀히 묘사하다 돌연 몽상에 빠지기 시작하는 습성이 없다면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쓴 이 작은 조건들에 제가 지금 떠올릴 수 있는 책들이 우수수 탈락했다는 사실을 상기해봅니다. 박새님의 남은 5%가 뭘지도 궁금해요. 다음에 들려주세요.
박새 | 마지막으로 좀 귀여운 것을 부탁드려볼까 합니다. '나무좀'으로 삼행시 해주세요.
머위 | 나 - 나 사실 무 - 무좀 있어 좀 - 좀 그런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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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아일랜드의 가장 사랑받은,
가장 악명 높은 소설
아일랜드 현대문학의 새로운 장을 연 선구자📖 에드나 오브라이언 장편소설 《시골 소녀들》이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ESSE) 제18권으로 출간되었습니다.아일랜드 내에서는 격렬한 항의와 원성을,국제적으로는 호평과 상업적 성공을 얻은 이 소설은 데뷔작인동시에 항상 작가의 이름과 함께 언급되는 대표작인데요.흔한 성장소설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당시 사회 통념상으로는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파격적이라고 여겨져출간과 동시에 아일랜드에서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답니다.한평생 솔직하고 치열한 글로 아일랜드 여성을 비롯하여소외당하는 약자들을 대변했던 작가의 첫 작품을 국내에 선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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