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은근한 레터로 인사드리는 인문교양팀 편집자 🦫웜뱃입니다.
저는 출근길에 팟캐스트를 즐겨 듣는데요. 최근 김혜리 기자님의 〈조용한 생활〉에서 〈씨네21〉 송경원 편집장님과 녹음한 2024년 영화계 결산편을 들었는데, 중요한 키워드로 ‘재개봉’을 꼽으시더라고요. 실제로 2024년은 수많은 20~21세기 명작 영화가 재개봉해서 꾸준히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송경원 편집장님은 이를 ‘오래된 영화도 내가 보지 않았다면 새 영화처럼 느끼는 경향이 있고, 새로워진 극장에서 보는 것 또한 새로운 경험’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영화에 ‘재개봉’이 있다면, 출판에는 ‘개정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독자 여러분께 다시 소개하고 싶은 명저를 새로운 장정과 편집으로 소개하는 것이죠.
오늘은 일본에서는 100만 부 이상 판매되어 새로운 생명과학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한 과학책이자 한국에서도 오래도록 사랑받은 《생물과 무생물 사이》 개정판을 소개해드리려 합니다. 그리운 책을 다시 만난 마음으로, 또 새 책을 손에 든 설렘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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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문학적인 과학책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_최재천
문학적 감성과 철학적 사유의 과학자, 후쿠오카 신이치
저자 후쿠오카 신이치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생물학 교수이지만, 그보다는 문학적 감성과 철학적인 생명관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책은 최재천 교수님을 비롯한 과학자는 물론 아오이 유우(“인생의 새로운 재미를 찾게 해준 책”), 류이치 사카모토(“(그의 생명관은) 다양한 생명과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을 사유하는 기초가 된다”), 요시모토 바나나(“꿈과 희망과 반역이 빚어내는 흥미진진한 책”) 등 여러 예술가에게 영감과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들이 입을 모아 감탄하는 ‘문학적인 과학책’은, ‘철학적인 생명관’은 대체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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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오이 유우의 추천의 말이 수록된 《생물과 무생물 사이》 일본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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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출판사에서는 《생물과 무생물 사이》를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생물학 최대 수수께끼의 해답을 찾아가는 ‘과학 미스터리’로 홍보합니다. ‘생명의 지도’라고 불리는 DNA 구조를 밝혀낸 20세기 생명과학의 역사를, 과학자들의 끊임없는 도전(‘추리’)과 좌절(‘반전’)의 서사로 흥미진진하게 그려내기 때문인데요. 거기에 과학이라는 지식 너머 진리를 좇는 과학자들에 주목함으로써, 그들의 순수한 탐구심과 숭고한 노력부터 DNA 이중나선 구조의 ‘최초 발견자’가 되려는 욕심으로 저지른 부정 등 인간의 아름다움과 추함까지 포착해냅니다.
이 책을 여러 번 읽으면 한 편의 성장소설처럼 다가오기도 하는데요. 에필로그에 이르러서야 등장하는, 아름다운 나비로 피어나는 번데기를 보며 생명의 신비에 사로잡힌 소년이 생명의 본질을 알아내겠다는 꿈을 안고 수십 년 동안 노력한 끝에 좌절을 딛고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는 한 편의 인생 이야기이기도 하니까요. 저자는 자신의 삶을 바쳐 발견한 답을 개인의 이야기로 남겨두지 않고 자연 전체를 설명하는 하나의 철학으로 확장합니다. 개인의 이야기가 보편의 이야기에 닿는 순간이지요. 이렇게 정립한 저자의 생명관이 바로 ‘동적평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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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에만 존재하는 이 '동(動)적인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생명을 하나의 '흐름'으로 설명하는 새로운 생명철학
앞서 말했듯 《생물과 무생물 사이》는 20세기를 생명과학의 시대로 이끈 ‘유전자의 본체는 DNA이며, DNA는 이중나선 구조이다’라는 세기의 발견을 둘러싸고 진행되는 이야기입니다. 유전자의 본체가 DNA라는 것은 곧, DNA에 담긴 유전정보에 따라 생명체가 만들어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후 생명과학은 유전자의 개수와 32억 쌍이나 되는 그 염기서열을 하나하나 밝혀나가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설계도와 그 부품을 이해하면 완성품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접근 방식이었죠.
이러한 접근은 인과관계의 ‘원인’을 밝히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타당해 보입니다. 가령 스마트폰의 구조를 알기 위해 스마트폰의 설계도와 그 부품을 분석하는 것이니까요. 생물학자들은 새로운 유전자를 발견하고 그 유전자의 역할을 알기 위해 유전자를 ‘고장’ 냅니다. 스마트폰 충전 단자를 고장 내면 충전이 안 되듯, 유전자를 고장 내면 그 기능이 사라질 것이라 가정한 것이죠. 직관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결과는 이상했습니다. 유전자를 고장 내거나 제거해도, 그 생명체에 아무런 이상이 발견되지 않는 일이 자꾸 발생했기 때문이죠. 후쿠오카 신이치 역시 세계 최초로 GP2 유전자를 발견하고 실험실에서 GP2 유전자가 결여된 ‘녹아웃 마우스’를 만들어내는데, ‘녹아웃 마우스’는 다른 쥐처럼 아무 이상 없이 건강하게 일생을 보냅니다. 수십 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좌절의 순간에, 그는 바로 여기에 생명의 신비가 있음을 직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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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녹아웃 기술로 부품 한 종류, 한 조각을 완전히 제거하더라도 어떤 방법으로든 그 결함을 채우는 보완 작용이 일어나고 전체가 조화를 이루면 기능 부전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생명에는 부품을 끼워 맞춰 만드는 조립식 장난감 같은 아날로지로는 설명할 수 없는 중요한 특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뭔가 다른 다이너미즘이 존재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생물과 무생물을 식별할 수 있는 것은 이 다이너미즘을 느끼고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동(動)적인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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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가진 ‘동적인 것’, 그 고유한 특성을 후쿠오카 신이치는 동적평형動的平衡이라고 정의합니다. 인간과 같은 생명체는 정적이고 단일한 개체가 아니라 세포처럼 무수히 작은 분자들로 이루어진 동적인 ‘흐름’이라는 관점인데요. 우리는 자신을 ‘나’라는 한 명의 인간으로 인지하지만, 사실 ‘나’의 몸은 수십 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속에는 세포보다 몇 배는 많은 미생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 세포는 1초에 380만 개, 하루에 30g 정도가 사라지는 동시에 생성됩니다. 즉 인간이라는 생명은 자신을 파괴하는 동시에 재생하는 ‘흐름’으로서 존재합니다. 실제로 1년이면 그 사람을 구성하는 모든 세포가 새로워지지요. 하지만 우리는 1년 전의 자신을 잃어버리고 완전히 달라지는 일은 없습니다. 이 파괴와 재생은 평형을 이루며 진행되기 때문이죠. 이와 같은 동적평형의 생명관으로 보면, 유전자라는 ‘부품’을 제거해도 다른 유전자가 이러한 결함을 보완해주기 때문에 기계처럼 고장 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후쿠오카 신이치는 이를 영상으로 구현하기도 했는데요.
▼ '동적평형' 콘셉트 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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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라는 것을 우리는 외계와는 격리된 개별적인 존재로 느낀다. 그러나 분자 차원에서는 꼭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다. 우리들 생명체는 우연히 그곳에 밀도가 상승하고 있는 분자 ‘덩어리’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빠른 속도로 대체되고 있다. 그 흐름 자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항상 외부로부터 분자를 흡수하지 않으면 빠져나가는 분자와 수지가 맞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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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신이치는 자신의 동적평형 이론을 발전시켜, 생명이 탄생하고 소멸하는 원리를 수학적 모델로 구현합니다. 언뜻 철학적 사변으로 느껴질 수 있는 자신의 생명관을 과학과 수학의 언어로 증명한 것입니다. 생명체는 동적평형을 이루어 ‘소멸’(엔트로피의 증가)에 저항하고 생을 이어나가는데, 이 모델은 ‘소멸’을 ‘오르막길’, ‘생명체’를 ‘원’으로 표현하여, 생명체가 자신을 파괴하는 동시에 재생하는 것을 원이 오르막길을 오르는 것(=‘소멸에 저항하는 것’)에 비유한 것입니다. 원이 오르막길을 올라갈 힘을 다하면, 즉 생명체가 더 이상 엔트로피에 저항할 힘을 잃어버리면 소멸합니다. 예술에 조예가 깊은 과학자로도 유명한 후쿠오카 신이치는 ‘2025 오사카 엑스포’에서 ‘생명의 동적평형관’을 기획하여 이 수학적 모델을 복잡한 수식이 아닌 시각 예술로도 표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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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에는 개별적인 시간이 잠재되어 있다"
삶의 철학으로서의 '동적평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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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느티나무에 붙어 있어도 가지는 저마다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가지는 단 한 번의 선택에 의해 바로 그 지점에 둥지를 틀고, 한번 가지가 뻗으면 모습을 바꾸는 일도,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일도 없다. 느티나무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세포분열과 네트워크의 확산, 그 동적인 평형의 행위는 시간에 따라 유유히 흘러가고 또한 일회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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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적평형은 한 인간이 어떻게 똑같은 ‘인간’이면서 ‘나’라는 개인인지를 설명하는 철학이기도 합니다. 같은 인간이더라도 ‘나’라는 개체가 살아가는 삶은 고유합니다. 그에 따라 개체의 동적평형 역시 변화하니, 다른 순간에 태어나 다른 삶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의 동적평형은 제각각이겠지요. 내 몸과 내 생각은 곧 '나'라는 동적평형의 결과입니다.
한편 생명체는 끊임없이 자신을 파괴하고 새롭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은 세포는 물론 인간의 사고에도 적용되는 관점입니다.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려면 우리는 과거의 잘못된 것들을 기꺼이 버려야 합니다. 비록 조금씩 닳아가지만 1년마다 세포를 모두 바꾸어야 살아남듯, 우리의 사고 역시 불완전하더라도 새로운 것으로 바꿔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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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신이치는 개체의 동적평형에 대한 사유를 자연계 전체로 확대합니다. 개체의 동적평형에서 무수한 점들이 ‘세포’를 가리켰다면, 자연계에서는 인간 한 명 한 명이 ‘세포’에 해당하는 점일 것입니다. 유전자가 고장 나는 등 일정 수의 ‘세포’가 오류를 발생시켜도, 동적평형 시스템은 이를 보완하며 균형을 찾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다른 세포의 기능을 방해하고 비정상적으로 자신을 증식하는 세포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가령 암세포처럼 말입니다. 자연계를 살펴본다면, 다른 생명의 존속을 위협할 만큼 비정상적으로 자신을 증식하는 개체란 인간뿐입니다. 인간이 자연계의 동적평형을 붕괴시키는 것은 암세포와 유사한 원리이지요. 그러니 인간 역시 자연계의 동적평형에 녹아들어야 합니다. 동적평형이 무너지면 개체 자체가 소멸하니까요.
이처럼 동적평형의 세계관은 유전자 하나, 세포 하나에서부터 ‘나’라는 인간을 넘어 자연계라는 거대한 흐름까지 설명하여,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합니다.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개정판 표지에는 이 동적평형의 철학이 DNA 이중나선을 통해 표현되어 있는데요. 기계론적 생물학의 시대를 연 DNA 이중나선 역시 동적평형에서 벗어나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후쿠오카 신이치의 생명철학이 지닌 포용성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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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표지에 담긴 DNA 이중나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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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신이치는 ‘죽음’을 생명체가 할 수 있는 가장 가장 이타적인 행위라고 설명합니다. 개체의 죽음은 자연계의 동적평형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며, 다른 개체가 탄생하기 위한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류이치 사카모토와의 대담집 《음악과 생명》에서 일본어의 ‘수명(寿命)’과 ‘축하하다(寿く)’는 같은 한자를 사용한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이를 자연계의 동적평형 관점에서 죽음이란 ‘축하할 일’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이처럼 생명체의 탄생부터 그 고유성을 넘어 죽음의 의미까지 되새길 수 있는 ‘철학적 사유’에 미스터리 소설의 흡인력과 ‘문학적 감수성’까지 더한 (소개만으로도) 놀라운 과학책을 전해드리며, 저자의 목소리로 이만 문을 닫아보겠습니다.
"자연의 흐름 앞에 무릎 꿇는 것 외에, 그리고 생명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는 사실 한 소년의 일상을 통해 이미 오래전부터 밝혀진 사실이다." _에필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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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용 정신과 전문의가 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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