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편집자 ⛑이판권입니다. 한 계절 지나 다시 인사드려요. 저는 지난주 금요일에 신간 《순교자!》를 마감했어요. 다음 주 월요일이면 만나보실 수 있을 텐데요, 오늘은 출간을 앞둔 책 이야기를 곁들여 편집자에게 너무도 소중한 ‘일러두기’ 페이지에 관해 말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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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에게 일러두기란,
[이 제품은 땅콩을 사용한 제품과 같은 제조시설에서 제조하고 있습니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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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 제조업자는 만에 하나 있을 상황에 대비해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성분의 혼합 가능 정보를 상품 포장지에 표기합니다. 저는 책의 ‘일러두기’ 페이지가 이 문구와 기능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만에 하나 있을 문제를 줄이고 책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필요하지만, 대체로 안 봐도 읽는 데 문제는 없는, 그런 페이지니까요. 하지만 편집자는 온갖 노파심을 다 담아 이 페이지를 작성합니다. “맞춤법이 안 맞는 표현이 들어가 있는데, 다 맞춤법에 맞는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하필 내가 만든 책을 읽고 수능을 봤다가 맞춤법 문제를 틀리게 되면 어떡하지?! 그러니 맞춤법에 안 맞는 표현이 있다고 써야 해!!” 하면서요.
《순교자!》를 만들면서는 그 노파심이 극에 달했는데요, 실제 일러두기 문장과 함께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모르셔도 역시나 책을 읽는 데 전혀 문제가 없지만, 알아봐주시면 편집자는 너무 고마운 그런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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➊
본문의 주는 모두 옮긴이의 것으로,
괄호 안에 글씨 크기를 줄여 표기했다
《순교자!》는 지난해 영미권 21개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며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던 작품 중 하나입니다. 비행기 격추로 어머니를, 고된 노동으로 아버지를 잃은 젊은 시인이 ‘의미 있는 죽음’에 관한 집착 아래 펼치는 그 자신만의 ‘순교자 프로젝트’가 담긴 책으로, 작가는 팬층이 두터운 시인이자 아이오와 대학 문예창작 과정을 이끌고 있는 카베 악바르입니다. 읽고 있노라면 풍자와 비애를 종횡하는 작가의 필력에 감탄하게 되는 소설이지요.
질주하는 문장들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으면 할 때, 해외 도서 편집자가 우선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각주의 위치를 바꾸는 것입니다. 본문 하단에 각주가 있으면 시선이 좌우뿐만 아니라 위아래로도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집중력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긴 설명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각주를 본문에 글씨 크기를 작게 해서 넣습니다. 그러니 일러두기에 ➊번과 같은 문장이 있다면, ‘긴 설명이 필요할 만큼 아주 어려운 책은 아니다’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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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ltiadis Fragkidis/unsplas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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➋
거리명은 street는 가(街)로, road는 로(路), avenue는 대로(大路)로 옮겼다
예전에 다른 책을 작업하다가 격자형으로 기획된 근대 이후 도시들의 도로명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street는 동-서로 흐르고 양쪽에 건물이 있는 도로, avenue는 남-북으로 흐르며 보통 street보다 좀 더 넓은 도로, road는 좀 더 포괄적인 의미의 도로라고 하더군요. 이 정보를 한번 알고 나니, 이 특징이 뚜렷이 드러나는 뉴욕과 같은 도시가 배경인 책을 편집할 때, 고민이 많이 되더라고요. 현지 독자들은 도로명만 봐도 공간이 바로 그려질 텐데, 번역서로 읽을 때는 그럴 수 없겠구나 하고요. 그래서 불충분하게나마 구분을 해서 넣고 있습니다. 은행나무에서 나온 책 중에 이 문장이 들어 있다면, 그건 잘 구획된 실제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을 확률이 80%, 제가 만든 책일 확률이 100%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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➌
인명, 지명을 비롯한 고유명사의 표기는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법 규정을 따르되 이미 굳어진 외래어, 한국어 화자 대부분이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외래어 표기는 예외로 하였다.
이 문장은 외래어 표기법과 실제 쓰는 외래어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책에 부득이하게 넣을 수밖에 없는 문장입니다. 그 유명한 ‘로브스터(랍스터)’부터 ‘내털리 포트먼(나탈리 포트만)’까지 입말과 맞지 않는 표기가 너무 많으니까요.
그런데 《순교자!》를 만들면서는, 이 문장을 빼야 하나 고민을 했더랬습니다.
주인공이 이란계 미국인으로, 맹목적 확신에 물든 떠나온 조국-오만한 배타주의에 물든 현재의 조국 사이에서 경계인이 겪는 분노와 고뇌가 이야기의 한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페르시아어 표현이 간혹 나오는데, 페르시아어는 현재 정해진 외래어 표기법이 없습니다. 때문에 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나 언론이 다룬 인물의 표기가 다 제각기여서,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제 결론은 무엇이었을까요? ‘누군가 등장인물을 검색하고 싶을 때, 검색이 되는 표현으로 하자’였습니다. 그렇게 제 혼돈과 불안을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외래어 표기’라는 말에 욱여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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➍
단행본은 『』로, 시·잡지·신문은 「」로, 음악 앨범은 《 》로, 영화·TV 프로그램·노래·회화는 〈 〉로 구분했습니다.
책을 낫표(『』, 「」)로 표기하는 것을 호불호의 문제라고 한다면, 저는 세로쓰기에 적합한 기호라고 생각해서 불호입니다. 그리고 저희 회사 책들은 이 표기를 안 쓰는 것을 기본 규칙으로 삼고 있어요. 하지만 《순교자!》의 경우에는 불가피하게 낫표를 사용하였는데요, 책과 시, 음악, 영화, 그림 등이 자주 언급되는 작품이어서, 읽으면서 ‘이건 영화군, 아 이건 책이네, 이런 노래가 있었어?’ 하는 식으로 바로바로 파악이 가능했으면 했어요. 그럼 검색의 폭이 훨씬 좁아지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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➎
「MARTYR! THE ZINE」은 『순교자!』의 작가 카베 악바르가 직접 만든 잡지로, 작가에게 영감을 준 이미지와 글의 콜라주와 책에 실리지 않은 에피소드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은 책에 들어간 일러두기는 아니고, 인터넷 서점 굿즈인 ‘콜라주 매거진’에 들어가는 일러두기입니다. 카베 악바르는 문학 거장들과의 인터뷰 전문 웹진인 〈다이브대퍼〉의 창간자이기도 하고, 비정기적으로 독립출판물을 발행해 수익금을 기부하는 등 실험적 시도를 하는 작가입니다. 이번에 자신의 첫 소설 《순교자!》를 발표하면서 책과 관련해 자신이 쓰고 그리고 콜라주한 것들을 담아 잡지를 만들어 배포했어요. 한국 독자들도 이 재밌는 시도를 함께 즐겼으면 하는 마음을 ‘일러두기’에 살포시 담아보았습니다.
이렇게 이런저런 고민과 욕심을 담고 덜고 하는 과정을 거쳐 일러두기가 완성됩니다. 모든 편집자가 저와 같은 고민을 하는 것은 아니고, 또 같은 고민으로 다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맞는 답은 없으며, 사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내가 한 선택이 맞았나’ 하는 의구심이 들어요. 혹시 저희 회사 책을 읽으실 때 형식적으로 불편했던 점은 없으셨을지 궁금합니다. 계속 좀 더 읽기 편한 책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면서 책 만들겠습니다.
*《순교자!》 제목에 왜 느낌표가 들어가는지 궁금하시다면, 다음 주 월요일까지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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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종달새를 가둘 수 있어도 그 노래는 가둘 수 없다.”
이 말을 남긴 아일랜드의 단식 투쟁가 보비 샌즈의 생을 담은 영화입니다. 《순교자!》에서 보비 샌즈는 작품 메시지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인물이에요. 작업하는 내내 테러범이 아닌 정치범으로 인정받기 위해 목숨 바쳐 저항한 그의 삶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마감하면 보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드디어 그날이 왔네요! 이번 주말 저는 보비 샌즈와 함께 의미 깊게 보내려고 합니다. 구독자 여러분도 평안하고 좋은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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