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은근한 레터로 인사드리는 인문교양팀 편집자 🦫웜뱃입니다.
지난주 성폭력 가해자의 혀를 깨물어 일부를 절단했다는 이유로 ‘중상해죄’로 유죄를 선고받은 최말자 선생님이 재심 공판에서 무죄를 구형받았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최말자 선생님은 무려 61년 동안 성폭력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라는 누명을 쓰셨는데요. 2020년 자신의 정당방위를 인정받고자 법원에 재심을 청구하여, 5년 만에 기쁜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
|
|
한편 성폭력 가해자인 노 씨는 성폭력은 인정되지 않고 다른 죄목으로, 최말자 선생님보다도 적은 형량을 선고받았는데요. 대체 어떻게 가해자는 피해자로 대우받고, 피해자는 가해자로 몰리게 되었을까요? 오늘은 《가해자는 모두 피해자라 말한다》를 통해 이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합니다.
|
|
|
➊ 피해자는 어떻게 피해자의 자리를 빼앗기는가?
저자 릴리 출리아라키는 먼저 기득권 중심의 공감을 원인으로 제시합니다. 가령 어느 여성이 성폭력 사건을 고발했을 때 남성 가해자가 받을 ‘피해’에 연민과 공감이 몰리는 것처럼 기득권이 입을 피해에만 이입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안희정과 박원순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되었을 때도 많은 지지가 여성에게 ‘무고’라는 낙인을 찍고 ‘거짓된 고발로 인한 명예훼손’과 정치적 피해 등을 우려했습니다. 법정에서도 가해 남성의 ‘창창한 미래’를 걱정하며 감형을 내리는 일 역시 비일비재합니다. 게다가 최말자 선생님이 법정에 섰던 1964년에는 아직 성범죄 처벌규정이 ‘정조에 관한 죄’에 머물러 있어 여성의 피해가 아주 제한적으로 인정되고 있었으며, 재판부도 피고가 “발음에 현저한 곤란을 당하게 하는 등 불구의 몸이 되게” 하였다고 말하며 남성의 ‘피해’에 먼저 이입하고, ‘남성에게 호감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 ‘남성과 결혼할 생각이 없느냐’는 둥 2차 가해를 가했습니다. 저자는 이처럼 (백인)남성은 “근본적으로 선하고 오직 우발적으로만 나”쁜 것으로 여겨진다고 말합니다.
세상이 자신의 피해에 이입하고 공감해주다 보니, 기득권과 가해자 역시 자신의 ‘피해’만을 생각합니다. 성폭력 피해자의 2.6%만이 경찰에 신고하지만 62.7%의 남성이 ‘남성은 부당하게 잠재적 성범죄 가해자’로 몰린다고 생각하며, 성범죄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면서 ‘응급의학과에 지원하여 속죄’하겠다고 말하는 식입니다. 저자는 기득권-가해자가 자신의 ‘피해당할 가능성’을 과장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말하는 백인 피해도착증 개념을 소개합니다.
|
|
|
"캐스린 히긴스는 이를 “백인 피해도착증white victimcould”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것은 “(피해를 실제로 입었는가, 피해가 일어날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가를 따져묻는 대신) 피해를 입을 수 있다면 그 확률이 아무리 낮다해도 그 사실만을 가지고… 겁먹은 백인 주체를 도덕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는’ 자리에 위치시키는 도덕적 정당화의 구조”라는 것이다."
_《가해자는 모두 피해자라 말한다》, 199쪽.
‘도착’은 주로 ‘도착증’(성적인 대상이나 행위에 있어서 비정상적인 것을 좋아하는 이상 성욕)으로 사용되는 단어로, 여기서 백인 피해도착증은 자신이 피해를 입을 확률이 1%라도 있다면 그 가능성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고 피해 가능성을 과장하여 ‘나야말로 억울한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성원 역자님은 번역어를 고민하시며 ‘도착증’의 어감이 너무 강할 수도 있겠다고 우려하셨지만, 현실에서는 1964년부터 지금까지도 기득권-가해자의 피해에 자신은 물론 법정과 사회마저 ‘도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
|
➋ 가해자는 어떻게 피해자의 자리를 빼앗는가?
이 책을 편집하는 동안에도 많은 가해자(가해 용의자)가 자신을 ‘피해자’로 호명했는데요. 불법 계엄(내란)을 일으킨 윤석열은 구속영장 청구를 두고 “권력자라 더 피해를 본다”고 표현했고, 그의 탄핵을 반대한 여당은 “탄핵 트라우마”를 주장했습니다. 한편 미성년자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모 배우는 눈물의 기자회견을 열었고, 생방송에서 언어 성폭력을 저지른 모 의원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판이 ‘집단 린치’라고 부당함을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앞서 살펴보았듯 피해를 당했다고 반드시 피해자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피해자로 인정받는 것은 상해를 입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주어지는 일이 아니라 권리이고, 심지어는 특권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특히 소셜미디어를 통해 ‘나는 억울하다!’라는 가해자의 주장이 일파만파 퍼지는 사회에서는, 소위 🗣️‘목소리가 크면 이기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즉 자신의 고통을 더 크게, 더 널리 발화할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은 지지를 얻어 ‘피해자’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
|
|
이렇게 가해자들은 피해자(들)에게 저지른 폭력 때문에 결국 자신이 피해를 보았으며(명예가 실추되었다거나 오해를 받았거나 심신에 충격을 겪었다는 등의), 그러므로 연민과 공감과 지지를 받아 마땅하다고 호소합니다. 그저 가증스러워 보일 뿐인 듯한 이 행위는 기득권을 활용해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나를 가해자라 지목한 이들을 비난하라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자신을 피해자라고 주장한 윤석열과 여당 지지자들, 모 배우의 팬과 모 의원의 지지자들은 그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온갖 모욕을 가했습니다. 피해자의 지위를 정치적 무기로 휘두르게 된 것입니다. |
|
|
➌ 피해자의 자리를 함께 지켜내는 법
최말자 선생님의 경우처럼, 한번 빼앗긴 피해자의 자리를 찾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무려 60여 년 만에 그 기회를 얻었으니까요. 이같이 오늘날 ‘누가 진짜 피해자인가’라는 진실공방은 여전히 법원에서 마무리되는 듯합니다. 법이 공정한 것은 아님에도, 서로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 누군가 법정에서 유죄/무죄 판결을 받길 기다리는 것이 최선일까요? 저자는 ‘나는 억울한 피해자다!’라는 주장이 부딪힐 때, 누가 억압당하는 취약한 피해자인지를 가릴 방법으로 🧐 피해자성 탐문법을 제안합니다.
|
|
|
가령 어느 남성이 여성의 성폭력 고발로 인해 잠재적 성범죄자로 몰리는 ‘피해’를 입고 있다고 주장할 경우 그는 남성을 피해자로, 여성을 무고의 가해자로 상정합니다. 그는 온라인상에 만연한 여성혐오적 공동체를 집결시켜 분노를 유발하고, 그로 인해 성폭력 피해자의 2.6%만이 경찰에 신고하는 사회에서 여성 피해자를 침묵시키려 합니다. 이는 성차별이라는 사회적 배제를 전제하고 영속화하는 발언입니다. 저자는 이때 (물론 세세한 정황을 살펴야겠지만) 우리가 그의 무고 주장이 아닌, 여성의 성폭력 피해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구조적으로 차별받는,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기 어려운 취약한 존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요.
그럼에도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을 지키는 것이 신중한 태도이고, 누군가의 편을 드는 것은 ‘주관적이고 편향적인 입장’처럼 느껴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최말자 선생님이 50여 년 동안 자신을 ‘가해자’로 규정해온 사회에 맞서기로 마음먹은 것은 2018년 12월, 서지현 검사와 김지은 씨의 성폭력 고발로 미투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수십 년 동안 침묵했던 수많은 여성이 목소리를 냈던 연대했던 시기입니다. ‘나는 억울한 피해자다’라는 목소리가 넘실대는 ‘고통의 민주주의 시대’에, 취약한 이들에게 목소리를 더하지 않는다면 피해자를 참칭하는 가해자들의 시대가 올지 모릅니다. 《가해자는 모두 피해자라 말한다》를 읽으며 정치적 무기로 남용되는 💬피해자의 언어를 되찾는 고민을 함께해보시길 권합니다.
|
|
|
📚 웜뱃의 Curation
─ 《가해자는 모두 피해자라 말한다》와
함께 읽기 좋은 책 3권
|
|
|
: 타인의 아픔에 무감해지는 ‘고통의 민주주의 시대’에 ‘고통에 대한 문해력’을 키워줄 수 있는 책
: 무엇이 2차 가해이고, 2차 피해인가? ‘피해자 중심주의’는 어떻게 피해자를 옭아매는가? ‘가해’와 ‘피해’의 개념으로 읽는 페미니즘
: ‘지배 문화는 어떻게 약자의 죽음을 이용하는가?’ 살아서는 소수자가 되고 죽어야만 ‘영웅’이 되는 유대인의 역사로 읽는 모든 소수자의 삶 |
|
|
오늘 은근한 레터는 어떠셨나요?
아래 버튼을 클릭해서 감상을 남겨주세요!
추첨을 통해 매달 마지막 주 목요일
세 분에게 음료 기프티콘을 선물로 드려요. 🎁 |
|
|
"운명은 어떻게 눈처럼 내리는가?"
인간 보편 멜랑콜리아의 시작 어두운 매혹의 환상 동화
✶
루마니아 현대문학의 대표 작가 미르체아 커르터레스쿠의 국내 첫 출간작
《멜랑콜리아》가 은행나무세계문학 시리즈에세(ESSE) 제24권으로 출간되었습니다.
❝단 한 문장으로 독자를 더 고양된 문학 세계로 끌어올려주는 위대한 작가.❞
_〈르주르날뒤디망슈〉
❝평행우주, 도플갱어, 다차원적 반영으로 가득한 미로 같은 서사 구조. 융, 볼라뇨, 데이비드 린치의 혼합.❞
_〈WDR5〉
기이하게 낯설고 몽환적인 세계 기억과 존재의 근원을 향한 내면의 여행
|
|
|
〈 은근한 레터를 만드는 사람들 〉
🦋만희 • 🐦⬛박새 • 💧망초
📬 은근한 레터는 격주로 발송됩니다
2025년 8월 14일 (목) 오전 8시에 57p로 만나요!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