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문학팀 편집자 🐁머위의 인사
🎼 X-ray 필름에 기록된 음악 🥗 채집 생활: 가구와 과일
👀 이번 달 신간은?
🎤 북토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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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아홉 번째 페이지를 쓰는 편집자 🐁머위입니다. 태풍이 불었다가 다시 햇볕이 쨍쨍해지고 양산은 자꾸 우산이 되는 바람 잘 날 없는 여름이에요. 어느덧 8월의 절반이 지났습니다. 다들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제 닉네임 머위는 최근 먹은 머위 줄기 들깨 무침에서 왔습니다. 요즘 여름철 밑반찬으로 머위와 레몬즙을 칙칙 뿌린 양배추 샐러드를 즐겨 먹고 있어요. 이렇게 건강한 식사를 마친 뒤에는 입 안이 마비될 만큼 달고 쓴 카카오 99% 초콜릿 쿠키를 섭취합니다. 이 의식은 마치 개운히 샤워한 뒤 무더위 속 찜통의 도시로 진입하는 것과 같아요. 무언가를 망칠 다짐이랄까요…. 여름은 강제로 인내와 용기가 습득되는 계절입니다.🥬🍫
저는 작년 봄부터 해외문학 일을 시작했어요. 책을 포함해 무언가를 만들어 건네는 일은 취향을 모르는 누군가의 생일 선물을 고르는 일과 비슷한 것 같아요. 저도 기쁘고 상대도 기뻤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이 기쁨의 균형은, 아무도 앉지 않으며 바람조차 불지 않는 곳에 놓인 시소를 상상하는 것처럼 허상 같다는 생각도 종종 듭니다. 그래도 최근 읽은 책의 대사처럼 지금까지 한 일 중에 황당무계하지 않은 건 없었으므로 기왕 이렇게 된 거 나와 주위 존재들의 황당한 꿈의 든든한 공모자가 되어보고 싶다는 소망을…. ("지금까지 우리가 한 것 중에 황당무계하지 않은 게 있었나? (……)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황당무계를 엄호하는 것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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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도 올여름도 같은 작가의 원고를 보며 지내고 있어요. 작년 가을 출간된 《지구에 아로새겨진》에 이은 다와다 요코의 3부작 중 두 번째 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문문과 비타라는 친구들이 등장해요. 덴마크의 유령병원 반지하에서 설거지 노동을 하는 두 친구는 시원한라라 그늘에라라 눕고파라라 하는 식의 놀이 언어를 만들어서 씁니다. 번역원고를 처음 받았을 때 훑어본 뒤 '드디어 외계인이 등장하는군요!' 번역가 선생님께 반가워하니 '얘네 사람인데요…'라는 답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원고를 다시 천천히 읽다 보니 두 친구는 그저 보통의 언어가 지루해서 라라를 덧붙여 말하는 거더라고요. 앗 그리고 이케아 가구 덕후 의사도 나옵니다. 그 의사가 이런 말을 해요. "색다른 비유가 떠오르면 고통에서 해방되는 기분이 든다." (🐁: 그런데 사람도 외계인도 아닌 존재가 소설에 정말 등장한다는 사실…….)
곧 찾아올 문문과 비타의 등장, 기대해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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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존재하지 않는 책을 한 권 소개했으니 이미 존재하는 책도 한 권 소개할게요. 책은 종이로 만든 환영 같은 자양분.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커다란 초록 천막》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앞서 다와다 요코의 책이 마법사가 쓴 책이라면 이 책은 요리사가 쓴 책입니다. 러시아 소설을 읽을 때마다 운명의 요리사 같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커다란 초록 천막》은 두께만큼 휼륭한 초록색 소설입니다. "원고가 너무 웃기고 슬퍼서 힘이 나요" 하고 동료 편집자님(🦊)께 얘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느 날 읽고 나타난 🦊의 제보: "사실 웅장하고 심각한 분위기일 줄 알았는데 귀엽고 산뜻해서 놀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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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모스크바. 어린 소년이었던 일리야, 미하, 사냐는 새끼 고양이를 계기로 친구가 됩니다. 각각 사진, 문학, 음악이라는 관심사를 가진 셋은 (트리아농이라는 활동명까지 짓고) 앞서 험난한 시대를 살아간 예술가들의 삶을 탐험하며 견고한 우정을 쌓아갑니다. 셋 모두에게 각별한 애정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이 가는 친구는 단연코 사냐입니다. 다른 두 친구에 비해 정치 활동에 무심한 듯하지만, 예술 표현의 실험과 발명이 어떻게 세상에 새로운 흐름을 퍼뜨리는지를 보여주는 인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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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가 속한 시대에서
살아남고 시대와 화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유일한 것입니다.” 빅토르 율리예비치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다들 그의 말에 흔쾌히 동의했다. 음악에 심취해 있던 사냐만이 의문을 품었다.
그럼, 음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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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커다란 초록 천막 1》
혁신적인 예술 운동이 벌어졌던 시대가 배경인 만큼 《커다란 초록 천막》에는 소설가나 시인 외에도 여러 현대 음악가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스트라빈스키, 시닛케, 쇼스타코비치, 쇤베르크……. 어려서부터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지만 손가락이 구부러져 꿈을 이룰 수 없었던 사냐는 어느 날 한 노부인의 연주를 듣고 세상이 뒤집힌 듯한 충격을 받습니다. 그건 바로 낯선 실험과 괴이한 에너지로 가득한 🔮슈토크하우젠의 곡. 이후 음악 이론과 악보의 세계에 매료된 사냐에게 음악 선생은 발견한 것들이 많아질수록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들은 더욱 신비로운 빛으로 반짝인다는 말을 건네요.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미지의 영역에 귀 기울이며 세계의 숨겨진 가능성을 실험하는 것이 음악 연구의 길이라면서요. 사냐는 정말로 그렇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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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확실한 증거는 저쪽 세계에서 생겨나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이곳에 온 음악이라는 것이었다. 음대의 홀을 가득 채우던 것도 음악학교 복도에서 들리던 불협화음도 검은색 레코드판에 숨어 있던 소리도 음악이었다. 심지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것도, 널을 뛰며 오르락내리락하는 음표들도, 가끔 생겨나는 공백도, 세계와 세계 사이에 있는 갈라진 틈으로부터 비집고 들어오는 것도 전부 음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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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커다란 초록 천막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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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커다란 초록 천막》을 소개하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사미즈다트입니다. 러시아어로 스스로сам + 출판изда이라는 뜻의 사미즈다트는 당시 KGB를 비롯한 정부 기관의 검열로 인해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못한 예술 작품을 비밀리에 유통하는 행위 및 그렇게 만들어진 출판물을 의미합니다. 소설 속에도 당시 금서였던 파스테르나크나 나보코프의 책을 몰래 손에서 손으로 옮겨 읽었던 당시의 비밀스러운 해방감이 생생하게 담겨 있어요. 거미줄처럼 서로를 연결해준 우정의 연결망이자 생존 방식이었던 사미즈다트. 제가 특별히 동했던 지점은 사미즈다트가 음악에도 적용되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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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는 어릴 적 사냐의 집에 처음 갔을 때 이미 한번 겪었던 것처럼 완전히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사랑에 빠졌다. (……) 양배추 파이, 비네그레트와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놀라운 조지 거슈윈의 음악이 수록된 고관절 엑스레이 필름 음반에도 사랑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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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커다란 초록 천막 2》
이 문장을 처음 보았을 땐 엑스레이와 음반🩻💿이라는 독특한 조합에 놀랐는데, 내막을 알아보다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어요. 참고가 된 책은 《커다란 초록 천막》의 인문 분야 짝꿍 책이라 할 수 있을, 알렉세이 유르착의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이라는 책이었는데요. 당시 소비에트는 청년들에게 유해하다는 명목으로 서구의 로큰롤이나 재즈를 일부 금지했습니다. 이렇게 금지된 음악을 병원에서 폐기된 엑스레이 판에 기록해 몰래 유통했다고 해요. (엑스레이 판이 가장 싸고 쉽게 구할 수 있는 플라스틱이었기 때문이래요.) 갈비뼈라는 뜻의 료브라라고 불렸던 이 LP들은, 1970년대 카세트테이프가 보급되기 전까지 암암리에 활발히 거래되었다고 해요. 별에 아로새겨진… 아니 뼈에 아로새긴 록. 참으로 신기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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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에 단파 라디오와 영화로 인해, 서구 재즈와 로큰롤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지만, 소비에트 국영레코드점에서는 이런 음악을 찾을 수 없었다. 이는 자가 레코드판이라는 독립적인 음악 복제 기술의 발명으로 이어졌다. 재즈와 로큰롤이 담긴 원본 서구 레코드판을 중고 플라스틱 엑스레이 판에 복제했는데, 이 때문에 "뼈에 새긴 록rokna kostiakh"이라는 아주 흥미로운 속칭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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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알렉세이 유르착,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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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의 채집 생활을 소개해보려 합니다. 수집보다 채집이라는 단어가 조금 더 장난에 가깝고 덜 전문적인 느낌을 줘서 채집 생활이라는 제목을 붙여봤어요. 꼭 기억하지 않아도 아무 탈이 없을 테지만 은근히 기억에 어른거리는 것들을 모아봤어요.
🪑님은 어떤 장르의 음악을 가장 좋아하시나요? 저는 엠비언트ambient 음악을 가장 많이 듣습니다. 엠비언트 음악은 워낙 폭이 방대하고 다채롭게 뻗어나가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가구 음악이 있다고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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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사티는 자신의 음악을 가구 음악이라 불렀습니다. 이유 하나는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1번이 시몬스 침대 광고 음악으로 사용됐기 때문이고 다른 이유 하나는 에릭 사티가 자신의 음악이 방 안의 가구처럼 존재하길 원했다고 합니다. 공기와 빛과 같은 방식으로 공간에 머무는 음악. 기척을 지운 채 분위기를 전부 지배하고 있는 음악. 꾸안꾸 음악. 어찌 보면 주목을 끌기보다 훨씬 더 난감한 목표인 듯한데요. 저는 가구 음악을 좋아해서인지 책을 읽을 때도 가구 문장이라 불릴 법한 문장들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그다지 서사 진행에는 도움이 되지 않으나 페이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주도하며, 딱히 해명되지 않기에 계속 비결정적으로 남는 그런 문장이요. (하단의 후기를 통해, 가구 문장이 가득한 책을 제보해주세요⭐) 그나저나 소개하고 싶은 가구가 하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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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루이 비통이 프랑스의 탐험가 피에르 브라자를 위해 만든 여행 가방. 이 가방엔 간이 침대가 들어 있다.” 의자에 관한 흥미로운 책에서 발견했어요. 가방을 열면 침대가 있다니, 책을 열어도 침대가 있으면 좋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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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여름, 수박 많이 드셨나요? 저는 8월에 들어선 후로 수박을 전혀 먹지 못했어요. 그런 의미에서 여름에 어울리는 수박 음악을 하나 소개할게요. 미국의 재즈 음악가 허비 행콕의 ⟨Watermelon Man⟩이라는 음악이에요. 이것은 그야말로 수박 장수의 노래. 어떤 날씨나 기분에 들어도 언제나 나긋나긋한 즐거움을 주는 곡입니다. 퇴근길, 제가 타야 하는 버스가 차고지에 있던 날들이면, 이 노래를 틀고 두둠칫거리며 집으로 걸어갔습니다.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맛있고 시원한 수박을 먹기 위해 수박 장수를 따라 행진하고 있다, 하는 세뇌도 조금 필요합니다.) 사실상 수박 하나 이고 온 것처럼 땀을 흘리며 집에 도착하지만 그래도 흥겨워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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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첫 부분에서 소개한 다와다 요코 3부작의 두 번째 책 제목을 이 레터 안에 숨겨두었어요.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ESSE 시리즈의 다음 책이기도 한 이 책의 제목은 무엇일까요…?
이 비밀은 비-비-비-비-비-비-비-비 당신에게 곧 도착할 거라네.*
저는 이만 퇴장하겠습니다.
다음 레터에서, 또 다른 책과 가구 문장과 (그리고 부디 다른 날씨와) 함께 만나요.
* 《커다란 초록 천막 2》에서 인용된 나보코프의 시를 조금 많이 변형.
** 머위잎(봉) 사진 출처: 홈플러스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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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포에 빠진 🐁머위의 레터 잘 받아보셨나요?
은근한 레터에 대한 후기를 들려주세요.
독자님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
더 완성도 높은 레터를 보내드리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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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 《불안》
40만부 판매 기념
교보문고 단독 특별 리커버
★ 〈알쓸인잡〉 천문학자 심채경 박사 추천 책 ★
일상의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이 파헤친 불안,
그 원인과 해법을 제시하는 현대인의 필독서!
20여년 간 꾸준히 사랑받아온 스테디셀러를
마크 로스코 작품 표지로 새롭게 만나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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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길 잃은 세대’인가?
번역가와의 만남
이전 이디스 워튼 작품들과는 완전히 다른 결의 작품!
8월 24일 목요일 저녁, 번역가의 서재에서 만나요 :)
* 신청서 안내 숙지 후 참가비 선입금 * 입금 완료 후 신청서 제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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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포에 빠진 🐁머위의 레터 잘 받아보셨나요?
후기는 덕을 쌓는 지름길…
그럼 저희는 8월 31일 목요일 아침에 또 만나요!
🛒 다음 10p. 주제는?
🎉드디어 은근한 레터가 열 번째 페이지를 맞습니다!🎉 '책 이야기를 은근히 돌려 말해볼까' 하는 컨셉으로 시작한 은행나무 편집자, 마케터들의 수다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10p는 특별히 그동안 여러분이 후기에 보고 싶은 콘텐츠로 남겨주셨던 질문들에 대한 답변으로 채우려고 해요. 소소한 이벤트도 있을 테니 다음 레터도 많이 기대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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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한 레터 만드는 사람들
🎨팔레트 N인듯 S인듯, F인듯 T인듯. 경계를 넘나들며 '귀찮다'는 말을 남발하지만, 누구보다 만드는 데 진심인 콘텐츠 메이커. 출판사에 다니고 있으나 유튜브를 더 좋아한다. 2023 목표는 직업에 맞게 책 읽기. 가끔 '책 못 읽는 마케터 툰'을 그린다.
🦋만희 영화는 거의 매일 보고 책은 종종 읽는다. 뚜벅뚜벅 걷는 것도, 운전도 좋아해 자주 여행을 떠난다. 이 모든 것은 음악과 함께다. 원래는 패션을 업으로 삼으려다가 어쩌다 보니(?) 출판인이 되었다.
🐥박새 여름을 특히 좋아한다. 먹보 강아지, 잠만보 고양이랑 살고 있다. 이동진 평론가가 5점을 준 영화를 따라 보는 게 취미인 신입 마케터.
🤵🏻♂️제이픽 덕질을 삶의 낙으로 삼고 있다. 책, 아이유를 가장 애정하고 그 외에 거의 모든 콘텐츠에 빠질 준비가 되어있는 프로 N덕질러다. 영문학과 신학을 전공했고 현재 출판 마케터로 생존 중이다.
🦫웜뱃 주로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만들고 싶은, 편향을 사랑하는 편집자. 타인의 편향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봄날 낮엔 책 읽기, 저녁엔 넷플릭스 보기, 주말엔 전시 보기, 덕질은 숨 쉬듯! 너무 철들어버리지 않는 게 목표인 한국문학 편집자. 인생 모토는 열심히 일하고 신나게 놀자!
🐁머위 멀리서 도착한 것들을 반기며 사실 이걸 어떻게 하나 당혹스러운 땀도 조금 흘리면서 해외문학 편집을 하고 있다. 글자의 고유한 소리를 듣는 일이 시원한 풀밭에 앉아 과일을 맛보는 것만큼 기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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